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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주일칼럼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25-03-26 (수) 11:02 조회 : 98
지나친 돌들



아침에 / 돌멩이 하나의 곁을 지나쳤네 / 산비둘기 알만 하게 참 둥근 돌이었네 / 저 돌은 왜 내 곁에까지 굴러왔나? / 그들에게는 / 바다 냄새가 나는 사월이었고 / 내 주위선 꽃들이 함부로 제 빛깔을 탕진했네 // 한참을 더 가다가 / 매우 둥근 돌 자꾸만 보고 싶어졌네 / 너무 멀리 지나쳐 왔을까 / 뒤돌아보던 내 발이 / 이별을 알아 버렸네 / 어느새 하루가 또 저물었네 - 심재휘 <돌멩이의 곁을 지나왔네>



서촌에 가면 <박노수미술관>이 있어요. 지난 5월부터 내년 3월까지 그곳에서 박노수 선생의 그림을 전시 중입니다. ‘간원일기(艮園日記)’가 이번 전시의 주제라지요. 선생이 1980년대 후반부터 머물렀다는 부암동 ‘간원(艮園)’ 화실에서 그린 작품 30여 점이 전시돼 있습니다. 그림의 여백이 아름답고 단출한 색감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림만큼 눈길을 끈 건 ‘집’이었는데, 선생이 40년간 머물렀다는 고택의 건축양식이 재미있어요. 한옥 같기도, 일본식 가옥 같기도, 어쩌면 서양 집 같아 보이기까지 한. 이런 건축을 ‘절충식 기법’이라 부르나 봅니다. ‘절충’이라는 게 묘한 말이지요. 잘못하면 이도 저도 아닌 게 되고, 잘 어우러지면 신박하기 이를 데 없기도 한.



마당도 독특하더랍니다. 뭐랄까, 수석 정원이랄까. 선생은 평소 돌 수집에도 관심이 많았답니다. 자연 본연의 경치, 이를테면 산이라든가 절벽 같은 모양을 품은 돌을 모아 정원에 옮겨 두었습니다. 정원 한쪽에는 작은 수석들을 전시해 둔 공간도 있는데, 정원에 있는 돌들은 한 아름에 들지 않는 커다란 수석이 대부분이었습니다. 돌도 돌 나름이구나 싶더랍니다. 사람만 차별 있는 게 아니에요. 온갖 게 다 차별입니다. 개도 다 같은 개가 아니라지요. 족보 있다는 어느 나라 ‘개님’은 여느 ‘사람놈’보다 귀할 겁니다. 돌멩이가 지천인 세상이지만 어떤 돌은 귀한 집 안방 가장 좋은 자리를 차지하기도 하더랍니다. 그나마 돌을 마당에 모아 놓은 게 다행인 건가요.



천금보다 귀하다는 수석도 있다지만 본디 ‘돌멩이’는 그리 대단한 취급을 받는 물건이 아닙니다. 어느 시인이 그랬다네요. 돌멩이는 “아무도 몰래 신(神)이 지구 위에 눈 똥”이라고. “눈도 코도 입도 귀도 없는 돌멩이”와 어울리는 건 ‘쨍그랑 유리창 깨지는 소리’라든가, ‘깨깨갱, 개 비명지르는 소리’ 같이 슬픈 거라고. 어디 돌멩이만 그럴까요. 돌멩이 취급을 당하며 사는 모든 것들이 다 같은 처지 일 겁니다. 더러는 무심해서 지나치고, 대개는 하찮게 여겨 지나친 ‘돌멩이들의 세상.’ 수석같이 귀한 것들만 대접받고 “산비둘기알만” 한 돌들은 어디서 굴러먹든, 어디서 굴러왔든 상관치 않는. 그저 “제 빛깔을 탕진”하는 ‘꽃’들만 ‘예쁘다’ 하는 ‘똥’같은 세상.



“건축자들의 버린 돌이 모퉁이의 머릿돌이 되었느니라(누가복음 20장 17절).” ‘돌’을 왜 버렸을까요, 건축자들은. 쓸모가 없으니까요. 나중에라도 쓸 요량이면 버리진 않았을 텐데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던 모양입니다. ‘창조의 똥’ 같은 것들을 어디에다 써먹겠어요. 갖다 버리는 게 낫습니다. 그렇게 버려진 돌을 주워다 ‘모퉁이의 머릿돌’을 삼는 이야기라니. 이거 대박 사건 아닌가요. 이런 ‘대박 사건’의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지 못하면 “저 돌은 왜 내 곁에까지 굴러왔나?” 물음에 대답이 어려울 겁니다. 사소한 것들을 하찮게 여기며 지나친 수많은 걸음을 멈춰 세울 수 없는. “너무 멀리 지나쳐 왔”음에도 그게 ‘이별’인지도 모른 채 허겁지겁하느라 “뒤돌아” 볼 줄 모르는.



“어느새 하루가 또 저물었네”요. 저녁은 반성의 시간일 겁니다. 누가 뭐라지 않아도 고개 돌려 뒤돌아보게 되는 날들이지요. 뒤돌아본 고개 너머 저만치 ‘지나친 돌들’이 눈에 밟혀요. 뭐 하느라 지나친 걸까요. 너무 바빴나요. 뭐에 그리 바빴을까요. 올라갈 때 못 보고 내려올 때 비로소 보았다는 꽃처럼, 올라가기 바빠서 그랬을까요. 오를 데도 없는데. ‘지나간 것은 지나간 대로 그런 의미가 있다’지만, 지나온 길 지나친 돌멩이의 구간만큼의 ‘탕진’이 못내 안타깝더랍니다. 저녁을 지나면 다시 새날. 숫자를 바꿔 하루를 맞으면 그 날 아침에는 “돌멩이 하나의 곁을 지나”치지 않고 살 수 있을까요. 그들 곁에서 “바다 냄새가 나는 사월”을 축복하며 말입니다.



이창순 목사 (서부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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