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서 가보게
지난가을, 큰비를 몰고 태풍이 두 번이나 다녀갔지요. 태풍에 마음 편한 이가 몇이나 될까요. 염려의 이유라든가 그 크기와 분량은 다르겠으나, 큰비 소식에 마음 환한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중 마음 졸일 사람들이 어부와 농부들이겠지요. 며칠 바다 일 못 나가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배 한 척 묶고 다시 풀기까지 어부 마음은 바다보다 먼저 바람이 일 겁니다. 지난 몇 계절을 그저 땅만 밟으며 지나온 농부들 마음도 한가지이겠지요. ‘태풍보다 풍작이 더 재앙’이라는 웃지 못할 말이 도는 세상이기는 합니다만, 그렇더라도 어느 농부라서 질펀하게 널린 낙과를 바라보며 밥이 넘어갈까요. 태풍예보 한 줄에도 한숨이 나오는 까닭이겠습니다. “목사님. 텍사스에 비가 엄청나게 왔다는데, 거기는 괜찮으세요?” 그랬는가 봅니다. 날이 흐리고 바람이 세서 웬일인가 했는데, 텍사스에 큰비가 내렸다는군요. 집에 TV가 없을뿐더러, 일기예보를 잘 보지 않는 까닭에 몰랐어요. 저희가 사는 ‘댈러스-캐럴턴’ 지역에는 비 한 방울 안 내렸거든요. 텍사스 땅덩어리가 좀 커야지요. 한국 TV에서 텍사스의 스테이크 ‘맛집’이 소개된 적이 있었는데, 어딘가 하고 검색해보니 자기 집에서 10시간이 넘게 걸리더라는 우스개가 있을 만큼 땅이 넓답니다. 남한 면적의 여섯 배가 넘는다고 하니, 어딘가에서 그리 큰 비가 내려도 다른 어딘가에서는 햇빛이 쨍하기도 합니다. 사람 살아가는 땅이 다 그렇던가요.
‘큰비’와 ‘태풍’과 ‘슬픔’을 따라 사는 인생은 드물 겁니다. 사람은 대개 쨍하고 환한 ‘기쁨’을 따라 살기 마련이지요. 그런데, 그렇게 “기쁨을 따라” 가다 만난 “작은 오두막”에서는 ‘슬픔’도 만나게 돼요. 본디 ‘기쁨’은 ‘슬픔’과 한 집 식구거든요. 지금은 잠깐 ‘기쁨’이 집을 나선 때이지만, “슬픔이 집을 비울 때는 기쁨이 집을 지킨다고” 하더군요. 찬 바람이 불면 더더욱 ‘기쁨’으로 난 길을 따르고 싶던가요. 그 길을 따라 살짝 가보았던 “작은 마당” 풍경이 마음을 찡하게 해요. 한겨울 찬바람과 그 뜨거운 여름을 지나면서도 묵묵했던 ‘나무의 까닭’이란 저 “붉은 감”에 있을 것이겠는데, 환한 기쁨이 아닌 서성서성 눈물을 줍고 있더랍니다.
마음 찡한 시간을 한참 서성이다 고개를 들었네요. 마당 뒤로 산이 “날개를 펴고” 있는 게 그제야 보였을까요. 서성이는 마음 한쪽에 대고 산이 더딘 입을 벌려 “말”하더랍니다. “어서 가보게, 그대의 집으로…” 마당보다 멀리서 들리는 말인데도 쩌렁쩌렁한 소리로 찾아와서 복잡하던 속마음을 씻어내더랍니다. 그 ‘말’을 들으며 왜 느닷없이 ‘변화산’을 오르내리던 제자들의 한때가 떠올랐는지 모르겠습니다. “꿈을 안고 왔단다, 내가 왔단다” ‘기쁨’을 따라나선 자리와, “괴론 세상에 할 일 많아서” ‘가라’ 하시는 ‘슬픈’ 명령의 충돌 때문일까요. 그래도 “어서 가보게” 하지 않으시고 “같이 가자” 하시니, 돌아선 걸음이 허하지는 않을 겁니다. ‘슬픔’이 ‘기쁨’에 그랬답니다. “나는 이제 너에게도 슬픔을 주겠다 / 사랑보다 소중한 슬픔을 주겠다.” 사람은 대개 쨍한 기쁨을 따라 사는 것이지만, 그 뒤로 난 길의 흔적에는 ‘슬픔’과 ‘아픔’이 빼곡합니다. 돌아서 집으로 가는 길, 어쩌면 그건 저 널린 ‘슬픔’과 ‘아픔’을 주워 담는 수고로운 길인지도 모르지요. 그런데, 그 길에 꽃이 피는 건가 봅니다. 그 길에 싹이 나고, 그 길로 가지가 뻗고, 끝내 그 길 끝에서 만난 “작은 마당에”서 “붉은 감 매달린 나무 한 그루”를 보게 되는. 본디, ‘슬픔/아픔’을 외면한 ‘사랑’은 없는 법이지요. “어서 가보게.” 산울림처럼 쩌렁댄 주님 음성 한 마디 더 알아들으라고, 이 깊은 가을이 있는 가 봅니다.
이창순 목사 (서부침례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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