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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주일칼럼

글쓴이 : 최고관리자 날짜 : 2017-09-27 (수) 13:49 조회 : 2336
맑은 날입니다.

‘섬진강 시인’ 김용택의 두 번째 시집 <맑은 날>에는 
아흔 넷 할머니의 장례를 치르며 담아둔 시상을 이야기처럼 풀어놓은 ‘섬진강 24’가 들어 있습니다. 무려 스물 세 페이지에 달하는 ‘장시長詩’지만, 서정성을 이야기로 풀어내는 시의 힘이 대단해서 길게 느껴지지 않습니다. 전통적인 상례(喪禮) 문화에 무지한 터, 그 예법에 대한 작은 공부와 그것에 담긴 옛사람들의 뜻을 헤아려 보는 기회도 됩니다. 발인을 앞 둔전 날 밤 펼쳐지는 ‘빈 상여 놀이’의 서러운 눈물과 헛헛한 웃음에 대한 이야기가 그렇습니다. 시인은, 그날 밤 자기 어머니의 곡 하는 소리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어매 어매 불쌍헌 우리 어매 / 불쌍허요 불쌍허요 / 우리 어매가 불쌍허요 / 인생살이가 불쌍허요 / 어매 어매 우리 어매 / 우리 어매가 떠나가네.” 그런데 “상여를 붙잡고 구슬프게” 곡을 하던 어머니가 곡을 뚝 그치고 부엌으로 들어가시며 이러게 말하더랍니다. “아이고 숨 넘어가겄네 / 나도 인자 고만 울랑만 / 나만 며누리간디 / 나 혼자만 울고 있었당게….” 지켜보던 사람들이 “한참을 멍해하다가 와르르 폭소를 터뜨”렸다나요. 상여 나가는 날, “이틀이나 울어서” 목이 다 쉰 어머니가 다시 곡을 합니다. “어매는 좋겄네 / 어매는 좋겄네 / 다 살고 죽었응게 / 어매는 좋겠네 / 어매 자식 만나로 강게 / 어매 남편 만나로 강게로 / 어매는 좋겄네” 그 울음이 전날 밤 부엌으로 들어가실 때의 그 마음처럼 ‘알 수 없는 것’인지는 잘 알 수 없으나, 상여 나가는 오늘의 울음에 거짓은 없어 보입니다. 

저 곡 소리에 담긴 ‘살이’의 아픔과 설움, 그 고단함이 담긴 눈물은 “이 산천의 눈물처럼 깨끗하고 강물처럼 가난”한 것이었겠지요. 숫자의 크고 작음이란 그 쓰임에 달린 것이겠으나, 사람 나이의 문맥에서 ‘아흔 넷’은 그리 서운치 않은 세월이라 하겠습니다. 그만한 숫자만큼을 남기고 세상을 떠날 때 사람들은 ‘호상(好喪)’이라 부르기도 합니다. 예기치 못한 장례의 갑작스러움을 벗을 수 있으니 비교적 넉넉한 마음으로 장례를 치를 수 있어서겠지요. 사람이 일정한 나이를 지나면 그 후로의 한 해 한 해는 죽음을 세며 사는 시간들이라 하겠습니다. 그렇게 손가락 헤아려 맞는 어느 한 날이란 이미 준비된 시간이어서 ‘호상(好喪)’이라 부르는가 봅니다.

그렇더라도 ‘죽음’은 - ‘헤어짐’이 그렇듯 낯설고 어색합니다. 그 어색함은 ‘호상(好喪)’에도 ‘곡’을 쏟아놓게 합니다. “불쌍허요 불쌍허요” 고인에 대한 측은함이란 ‘그이’가 지켜 본 고인의 세월 때문이겠습니다. “얘야, 내가 죽으면 / 내 간을 꺼내보거라 / 내간이 있는가 녹아부렀는가.” 하신 고인의 인생살이 때문이겠습니다. 그것은 그 길을 다시 꾹꾹 밟아 따라가는 ‘그이’ 모습이기도 해서 “어매는 좋겄”다고 “어매는 좋겄”다고 “다 살고 죽었응게 / 어매는 좋겄”다고, 죽음을 따라가는 이의 부러움 - 어색함이 됩니다.

‘맑은 날.’ “마을은, / 봄날의 부산했던 / 강변 작은 마을은 / 조용하고 맑기만 했습니다. / 꽃밭 등의 저녁
햇살이 / 눈부시게 사라지고 / 비질해놓은 마당에는 / 비질 자국마다 / 산그늘이 내리며 / 서럽게 해가 뚝 떨어졌습니다.” 할머니의 주검을 땅에 묻고 내려온 마을은 여느 일상과 다름없습니다. “조용하고 맑기만 했습니다.” 그 ‘맑은 날’ 아래로 “서럽게 해가 뚝 떨어”지는 소리를 듣습니다. 그 서러움을 지지고 볶아 다시 아무렇잖게 ‘맑은 날’ - 그 ‘봄 날’을 맞는다는 것, 그건 체념일까요 아니면 신앙일까요?


이창순 목사 (서부침례교회 담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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