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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은 계절보다 길다
“아무것도 두고 온 게 없는데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이 문장은 성해나 작가의 소설 『두고 온 여름(2023, 창비)』을 관통하는 문장이며, 우리가 일상 속에서 문득 마주하게 되는 빈 마음에 대한 정확한 표현입니다.
삶 속에서 무언가 잃어버린 듯한 기분. 아무것도 두고 오지 않았다고 믿으면서도, 돌아오는 길에 괜스레 마음이 저릿해질 때가 있습니다. 『두고 온 여름』은 그러한 감정의 틈에서 시작됩니다. 작고 조용한 이야기 속에 잠든 여름의 파편들. 이 소설은 그렇게 삶의 어느 한 시점과 어느 계절에 ‘두고 와버린 마음들’을 천천히 꺼내어 보여줍니다.
“그게 불편해요. 가족도 아닌데 가족인 척하며 사는 게.”
소설은 기하의 회상으로 시작됩니다. 사진사였던 기하의 아버지는 매년 여름 기하의 ‘독사진’을 찍어 사진관 쇼윈도에 걸어두었지만, 기하가 열아홉 살이었던 여름에 처음으로 ‘가족사진’을 겁니다. 아버지의 재혼으로 갑작스레 생긴 새로운 가족-새어머니와 이복동생과의 불편한 생활이 시작된 것입니다.
소설은 두 화자의 목소리를 교차하며 엮이는데, 첫 장과 셋째 장 ‘기하’는 기하가 새어머니와 이복동생 재하 그리고 그들과 함께 보낸 시간을 다룹니다. 이들이 한 가족이었던 시간은 길지 않았습니다. 4년여 만에 가족 관계가 해체되고 서로를 잊은 듯 살아가지만, 기하는 재하와 우연을 통해 다시 마주하게 됩니다. 그렇게 형제는 각자의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여름의 조각들을 맞추고, 잊고 있었던 감정과 상처를 되짚어 나갑니다.
둘째 장과 넷째 장인 ‘재하’에서는 기하의 이복동생 재하의 관점에서 끄집어낸 여름의 풍경들이 펼쳐집니다. 기억과 회상 속에서 먹먹한 감정들이 물결치며, 격렬한 사건 없이도 크고 작은 정서의 진폭들을 만들어냅니다. 재하의 기억 속에서, 옛 여름의 풍경은 마치 형제의 아버지가 찍었던 오래된 사진처럼 감정의 여백을 남깁니다. 상대에게 다정하려는 노력과 소중한 것을 지키려는 애씀. 그것이 때로는 서로를 더 멀어지게만 하는 슬픈 일이 되지만, 재하의 어린 시절은 슬픔으로 얼룩져 있지만은 않습니다.
성해나 작가는 2019년 동아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한 이후, 섬세한 문체와 관계에 대한 깊은 통찰로 주목받아 왔습니다. 『빛을 걷으면 빛』, 『혼모노』 등으로 각광받고 있으며 『두고 온 여름』을 통해 ‘보이지 않는 감정의 무게’를 세심하게 포착했다는 평을 받고 있습니다.
이 작품은 ‘관계란 언젠가 해체될 수밖에 없지만, 그 안에 머문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용히 일깨워줍니다. 즉, 실패한 관계를 뒤늦게나마 따듯하게 감싸 안는 용기를 그리고 있지요. 설령 그 지나간 관계가 재건되거나 감정이 복원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손을 내미는 행위가 삶에 있어 ‘다음 장면’을 열어준다는 따뜻한 사실. 소설의 말미에서 이때껏 과거의 상처에 매여 있던 재하가 비로소 천천히 새 삶을 향해 가는 장면은 우리가 미처 완성하지 못하고 두고 온 한 시절을 다독이는 격려입니다. 잊으려 애썼던 기억들이 오히려 깊은 그리움으로 남아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그리움이 결국 한 사람을 다시 살아가게 만든다는 것. 여름이 지나고 계절은 바뀌어 추운 바람이 일렁일 때, 오래도록 마음에 남을 이야기 한 편을 찾는 독자에게. 이 책은 따뜻한 여름의 바람을 품은 온기가 될 것입니다.
한아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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