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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로 난 신발
쓰레기통 옆에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이 있다 / 벗어놓은 게 아니라 버려진 신발이 / 가지런히 놓여 있다 / 한 짝쯤 뒤집힐 수도 있었을 텐데 / 좌우가 바뀌거나 이쪽저쪽 외면할 수도 있었을 텐데 / 참 얌전히도 줄을 맞추고 있다 / 가지런한 침묵이야말로 침묵의 깊이라고 / 가지런한 슬픔이야말로 슬픔의 극점이라고 / 신발은 말하지 않는다 / 그 역시 부르트도록 끌고 온 길이 있었을 것이다 / 걷거나 발을 구르면서 / 혹은 빈 깡통이나 돌멩이를 일없이 걷어차면서 / 끈을 당겨 조인 결의가 있었을 것이다 / 낡고 해어져 저렇게 버려지기 전에 / 스스로를 먼저 내팽개치고 싶은 날도 있었을 것이다 / 이제 누군가 그를 완전히 벗어 던졌지만 / 신발은 가지런히 제 몸을 추슬러 버티고 있다 / 누가 알 것인가, 신발이 언제나 / 맨발을 꿈꾸었다는 것을 / 아 맨발, 이라는 말의 순결을 꿈꾸었다는 것을 / 그러나 신발은 맨발이 아니다 / 저 짓밟히고 버려진 신발의 슬픔은 여기서 발원한다 / 신발의 벌린 입에 고인 침묵도 이 때문이다
- 강연호 <신발의 꿈>
한 켤레, 신발 선물을 받았습니다. ‘발이 편한 신발’로 입소문 난, ‘어르신들 신는 신발’로 평이 좋은, 값이 꽤 하는 신발이랍니다. 기왕이면 발 편한 신발이 좋고, 아직 ‘어르신’은 아니지만 그런 시선은 상관없는데, ‘값’이 꽤 한다는 그게 좀 걸렸습니다. 괜한 신경 쓰지 말란 뜻이었을까요. ‘뒤로 나온 신발이래요.’ 신발의 출처를 전하는 말에 풋 웃음이 납니다. ‘뒤로 난 신발’이라. 그게 뭘 뜻하는 건지 시시콜콜 알지 못하지만, 대강은 알 것 같습니다. 더러는 그놈의 ‘대강’이 사람을 잡기도 하는지라, 사람 잡지 않을 ‘대강’의 짐작으로 풋 웃음을 흘렸을 겁니다. 그 ‘뒤’가 무언인지 캐고 싶지 않았고, 묻지 않았습니다. 그걸 물어 아는 게 뭔 의미가 있을까요.
‘뒤로 난 신발’은 대놓고 내놓지 않더랍니다. ‘뒤로 난 신발’을 ‘뒤로 전하는’ 손길, 거기서 ‘뒤로난 마음’을 읽습니다. 저 뒷전을 서성이는 마음 안으로 조심스러움이 들고, 주고도 미안함을 가졌을 겁니다. 숱한 망설임으로 서성거렸을 ‘뒤로 난 마음’의 언덕. 거기에 ‘뒤로 핀 꽃 한 송이’가 수줍게 고개 들고 있었겠지요. 아, 드리고도 부끄러워 할 ‘세리의 마음’이 그랬을까요. 드릴 것이 그것뿐이어서 동전 몇 개 연보함에 떨어뜨린 가난한 과부의 마음이 그랬을까요. ‘뎅그랑’ 연보함에 떨어진 가난한 소리가 회당 저 구석까지 전해졌을 때, 그 ‘가난한 소리’를 ‘가장 값진 소리’로 새겨들으셨던 주님 마음 한 자락도 ‘뒤로 난 마음’이었을지 모릅니다.
이러니저러니, 되도 않는 정결을 따져가며 손가락을 앞세운 잘난 사람들의 세상. 거기 섞여 살고 싶지는 않은 모양입니다. 구부려 ‘뒤로 난 신발’을 내려놓는 ‘뒤로 난 마음’의 등 뒤에서, 가만히 저 ‘뒤로 난 마음’을 안아 주고 싶었던 가 봐요. 얼굴 마주하는 것조차 수줍어할까, 조심조심 등 뒤로 팔 내미는 ‘뒤로 된 포옹.’ 그런 거지, 수줍은 마음은 수줍게 받아 주는 거지. 당당하게 내놓는 무엇에 절절맬 것이 아니더랍니다. 저 조심스런 헌상에 전전긍긍하더랍니다. 그래야 하늘이 땅으로 내려오고, 땅이 하늘을 만나더랍니다. ‘발’이 얼마나 편한 신발인지 모르겠으나, ‘발’보다 ‘맘’이 편해야 그 신발 신고 걷는 걸음이 낙원 될 겁니다.
‘뒤로 난 신발’을 대놓고 신고 다닙니다. 간편한 바지 복장에도 그 신발을 신고 제법 갖춘 정장에도 그 신발 신습니다. 발이 편하다거나 취향에 맞아서가 아닙니다. 우스운 말이지만 그게 ‘뒤로 난 신발’이어섭니다. ‘뒤로 난 신발’을 신고 다니니까 내 걸이 다 ‘뒤로 난 걸음’ 같습니다. ‘뒤로 난 것’으로서의 ‘나’를 봅니다. 온전한 것 못 되는 ‘나’의 ‘뒤.’ 드러내 놓거나 크게 자랑할 것 없는 태생과 본성의 ‘나.’ 그 자격 없음의 경로를 따라 난 ‘뒤로 난 것’의 발자국을 보입니다. ‘돌아 보니 발자국마다 은혜’라 했던가요. 왜 아니겠습니까. ‘뒤로 난 것들’은 내 발자국에 적힌 ‘은혜’의 두 글자를 읽을 줄 압니다. ‘가난한 자’가 ‘복 있다’ 하신 까닭을 헤아려 읽습니다.
“쓰레기통 옆에 누군가 벗어놓은 신발” 아니 “버려진 신발.” 버려진 것의 아우성은 오래 가지 못하지요. ‘얌전히 줄 맞춘’ “가지런한 침묵”에 이릅니다. 그 “가지런한 슬픔”이 가슴 찡하다지만, 실은 그게 이제껏 바라온 ‘신발의 꿈’이었답니다. ‘가난한 신발’은 “맨발을 꿈꾸었”던 모양입니다. 한평생 끌려다니다가 버려진 자리. 거기서 입 벌린 채 침묵하는 ‘가지런한 침묵의 깊이’ 그걸 닮지 못하고 담지 못해 사람으로 사는 일이 천박해지는 건 아닐까요. 아직은 새것. 내 발을 이끄는 ‘뒤로 난 신발’도 언젠가 ‘헌것’이 되겠지요. 다시 뒷전으로 물러앉을 시간, 거기 저 ‘가지런한 자리’를 찾아가 ‘뒤로 난 것들’의 옛이야기를 나눠야 할까 봅니다. 평강.
이창순 목사 (서부침례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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